성석제 - 첫사랑

Posted by 정 다운 좋은글 : 2012. 2. 24. 16:09


1.

  ......

  
"너 누구하고 싸웠어?"

  
나는 싸운 적이 없다. 맞았을 뿐이다. 나는 일어섰다. 고개를 돌렸다. 네가 무엇이든, 내가 무엇이든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가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고양이과 동물처럼 빠르고 가볍게 다가온 너는 내 어깨를 눌렀다. 바로 그때 나는 내 장래 희망을 바꾸었다. 살아서 이 지옥을 빠져 나가기. 너는 빙글빙글 웃으면서 나를 흙먼지와 톱밥 속에 주저앉혔다. 나는 너를 노려보았을 뿐이다. 장래 희망을 바꾸었기 때문에.

  
봄이었다. 아프리카에서 코뿔소들이, 시베리아 벌판에서 사슴들이 각축하는 계절이었다. 코딱지를 누렇게 만드는 흙먼지가 떠다니는 지옥의 공기에는 빵 공장에서 빵을 찌면서 내보내는 고소하고 시큼한 냄새가 섞였다. 하늘은 시퍼랬다. 매일 똑같았다.

  
너는 신기한 물건을 본 것처럼 네 손가락으로 내 턱을 쳐들었다. 네 손길은 너무나 부드러웠고 자연스러워서 누군가에게 어떤 식으로든 위안받고 싶어하던 내게 거부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네가 말했다.

  
"넌 꼭 계집애같이 생겼구나."

  
나는 노려보고 노려보고 노려보다가 분해서 울고 말았다. 계집애처럼 흑흑 느껴 울었다. 너는 나를 한참이나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마음껏 울었다. 싸움과 코피와 수업을 빼먹었다는 것이 서럽지는 않았다.

  
너에게 계집애 취급을 받았다는 것이 슬펐다. 그런 취급을 받고도 아무 말도 못하고 찔찔 울기나 하는 내가 가여워서 머리가 아프도록 울었다. 너는 문득 사라졌다가 양동이에 물을 담아 가져왔다. 그 양동이에는 축구부라는 글자가 씌여 있었다. 그건 학교에서 가장 사나운 깡패들로 만들어진 축구부말고는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물건이었다.

  
"씻어."

  
나는 너를 깨끗이 무시했다. 축구부 양동이와 축구부를 무시했다. 온 세상을 무시했다. 일어서서 나왔다.

  
네가 무섭지 않았다. 그저 창피했다.

  
다들 너를 피했다. 너를 피하는 아이들을 너는 무시했다. 그런데 너는 너를 싫어하는 나한테는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네가 무섭지 않았다. 그냥 싫었다. 웬일인지 너는 그전처럼 수업을 빼먹지 않았다.

  ......

2.

  
그날도 길에는 빵 트럭이 지나다녔다. 길에서 공을 차던 아이들이 트럭 꽁무니에 달라붙어 같이 뛰기 시작했다.

  
빵 공장에서 나온 트럭들은 덜컹거리면서 달려가다가 이따금 빵을 떨어뜨리기도 했다. 그런데 그날은 빵이 상자째 내 코앞에 떨어졌다. 

  
"빵이다, 빵!" 

  
삽시간에 아이들 수십명이 모여들었다. 작은 먼지 구름이 만들어지고 그 속에서 아이들은 서로를 깔아뭉개고 올라타고 물어뜯으며 빵을 나눠 가졌다. 나는 제일 가까이에서 제일 빨리 빵을 집었지만 봉지를 뜯기도 전에 누군가 손목을 쳐서 내 빵을 가져가 버렸다. 나는 빈 빵 상자를 앞에 두고 멍하니 서 있었다. 

  
"빵 도로 놔, 새끼들아." 

  
언제 네가 다가왔는지 아이들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아이들은 순식간에 반쯤 뜯어먹은 빵까지 전부 다 상자에 내려놓았다. 나는 그냥 가려고 했다. 그런데 네가 나를 불렀다. 

  
"너, 거기서 다섯개 집어." 

  
나는 무시했다. 나는 네가 싫었다. 네가 그런 식으로 나한테 접근해 오는 게 싫었다. 

  
"나는 빵 안 먹어." 

  
보름달이 그려진 포장지 속에 든 빵이 얼마나 맛있는지 나는 진작에 알고 있었다. 하지만 끝내 그 빵을 집지 않았다. 나는 터덜터덜 집으로 갔다. 집 앞에서 너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는 찢어진 네 모자 속에서 빵을 꺼내서 내게 내밀었다. 

  
"왜 나한테 이러는 거니. 나는 거지가 아냐. 나는 빵이 싫어. 너도 싫어." 

  
네 턱이 딱딱해졌다. 미술책에서 본 그리스 조각처럼 각이 졌다. 너는 고함을 치면서 빵을 팽개쳤다. 

  
"사람 마음을 이렇게 모르냐." 

  
너는 모자까지 찢어버렸다. 대문을 발로 힘껏 차고는 가버렸다. 

  
"아니, 왜 대문을 차고 난리냐? 주인 보면 큰일날라." 

  
누나가 달려 나올 때까지 나는 찢어진 모자와 그 안에서 종이조각처럼 구겨진 빵을 노려보고 있었다. 

  ......

3.

  ......

  
"다섯 시다." 

  
너는 그 말만 하고 가버렸다. 나는 손을 씻었다. 씻고 또 씻었다. 가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잤다. 자려고 했다. 그런데도 웬일인지 나는 새벽 다섯 시, 목욕탕 창문으로 김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할 무렵, 건물 뒤편 쓰러질 듯이 위태롭게 서 있는 담 아래에 서 있게 되었다. 

  
"왔구나." 

  
너는 미리 와 있었다. 너는 담 밑에 있는 판자를 치웠다. 판자 아래에는 네가 쌓아 놓은 벽돌이 있었다. 

  
그 벽돌을 딛고 담 위로 올라갈 수 있도록. 

  
"올라가. 내가 받쳐 줄게." 

  
너는 나보다 키가 한 뼘은 더 컸다. 너는 나보다 두 배는 더 힘이 셌다. 네가 받쳐 주면 될 것이다. 

  
네가 올려 주면 될 것이다. 네가 믿음직하고 성실해 보일수록 부끄럽고 창피한 느낌이 커졌다. 그래서 나는 다른 핑계를 찾았다. 

  
"담 위에 유리가 있잖아." 

  
목욕탕 뒤편 창문은 담보다 더 높았다. 담에 올라서야 안이 보이는데 그 담 위에는 유리가 박혀 있는 것이다. 나는 기껏 호기심이나 채우자고 엉덩이가 찢어질 위험을 감수할 생각은 없었다. 

  
"내가 치워 놨어." 

  
그랬다. 너는 몇 시간 전부터 미리 그 곳에 와서 담 위로 올라간 다음 한 사람이 앉을 만한 자리만큼 유리를 부수어 놓았다. 네가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들키지 않으려고 얼마나 조심했는지, 왜 그런 일까지 했는지 내가 생각하는 동안 너는 문득 내 발을 받쳐 올렸다. 나는 얼떨결에 담 위에 올라갔다. 

  ......

4.

  ......
"난 계집애들한테 관심 없어."

  
나는 그렇게 말했다. 내 대답에 거짓이 섞이기는 했지만 거짓만큼 진실도 섞여 있었다. 그때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은 변소에서 그 처녀와 비슷한 빈도수로 발견되는 이야기의 주인공인 음악 선생이었다.

  
"그거 내가 먹었다."

  
거짓말. 그 처녀에게서는 늘 드라이 아이스처럼 찬 김이 뿜어져 나왔다. 아이들이 빵가게 앞에서 일없이 조금 머뭇거리든가, 살짝 들여다본다든가 하면 당장 용암과 같은 욕설이 터져 나왔다. 그 욕설의 첫 대목이나 마지막 대목을 장식하는 말은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들'이라는 말이었다.

  
매일 똑같았다. 그런데 그 마녀 같은 처녀를 처먹어?

  
가을이 되자 딴 세상처럼 너와 내가 사는 세상에도 바람이 자주 불었다. 집 근처 예전 과수원 자리에 몇 그루 안 남은 배나무에는 작고 뻔뻔스럽게 생긴 배가 열렸다. 곧 그 나무도 배도 쓰레기에 묻힐 운명이었다. 너는 나를 따라왔다. 항상 내 주변에 어른거렸다.

  
"걔를 좋아해?"

  
나는 그 처녀를 잘 몰랐다. 질투 같은 건 하지도 않았다.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도 너는 뽐내며 말했다.

  
"나는 관심이 없는데 그 계집애가 자꾸 따라다니거든. 그런데 걔는 꼭 구멍 난 속옷을 입는다? 너 좋아하면 하나 갖다 줘?"

  
네가 그럴 때마다 나는 너를 경멸했다. 벌레 먹은 배가 떨어졌다. 내가 가려고 하자 너는 초조해 했다.

  
"너한테 걔 먹는 걸 보여 줄까."

  
나는 네 눈을 들여다보았다.

  
"네 맘대로 해."

  
너는 풀이 죽었다. 그래도 끈질기게 속삭였다.

  
"내일 시험 끝나면 곰바위로 와줄래?"

   
나는 집에 와서 손을 씻었다. 네 말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런데도 내가 시험을 마치고 곰바위로 간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곰바위는 이따금 어른 남녀가 이상한 짓을 벌인다는 소문이 나 있는 학교 뒷산의 으슥한 곳이었다. 나는 그 전날 밤에 한잠도 자지 못했다. 시험 준비하느라 밤을 새우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다시 1등을 차지하려고 했다. 지옥을 빠져 나가는 1등석 기차표를 얻으려고 했다. 너는 공부를 못하면서, 공부를 잘할 생각도 없으면서 내가 왜 공부를 하는지도 모르면서 공부 잘하는 나를 따라다녔다.

   
어른에 가까우면서 아이와 가까운 나를 좋아했다. 어쩌면 내가 너의 잘난 것 어느 한 가지라도 존중해 줄 수 있다면 너의 맹목적인 헌신에 대한 빚 갚음이 될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지옥에서도 나는 성장해야 했다.

   
내가 가방을 든 채 바위 위로 올라갔을 때 너는 없었다. 처녀도 없었다. 나는 바위 위에 누워서 내가 왜 거기까지 왔는지를 생각해 봤다. 누나가 처음으로 탄 월급으로 사준 단벌 구두까지 신고, 그 구두의 콧등까지 까져 가면서. 내가 네 말을 믿다니. 나는 지옥의 가을 햇빛 아래에서 혼자 웃었다. 속아 준 것으로 빚은 없다. 와준 것으로 깨끗해졌다. 나는 돌아가려고 했다. 그때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

 
5.

 
그날 이후 매일 똑같았다. 나는 너를 상대하지 않았고 그 처녀는 중학생을 상대해 주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 떨어져서 도는 행성과 같았다. 너는 슬픔에 잠겨 네 맘대로 했고 나는 시름에 겨워 내 마음대로 했다.

 
 너는 퇴학을 당했고 나는 지옥에서의 마지막 시험을 치렀다. 네가 사라지고 나서 그 처녀도 사라졌다.

  
졸업식을 하기 전에 숫자가 적힌 종이 조각을 나누어 받았다. 그 번호를 가지고 추첨을 해서 진학하게 될 고등 학교를 정한다고 했다. 공고나 상고, 또 지옥의 특수지 고등 학교에 진학하게 된 아이들은 그런 종이 조각 따위는 받지 않았다. 불합격자에게는 당연히 그런 종이 조각이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니 학교를 중퇴하고 검정고시도 보지 않았으며 공고나 상고에는 관심도 없는 네가 그 종이 조각을 나누어 주는 특정한 날, 특정한 장소에 나타난 것은 이상한 일이기는 했다.

  
나는 종이 조각을 받자마자 교실 밖으로 뛰쳐나갔고 해방의 포만감으로 누나처럼 뚱뚱해지고 두 뼘은 키가 커져서 운동장을 달렸다. 빵집 간판이 넘겨다 보였을 때 잠시 멈추었지만, 사랑은 다 그런 법이라는 노래 가사를 떠올렸을 뿐. 그때 햇빛을 받으며 걸어오는 너를 보았다. 너는 두껍고 커다란 외투를 입고 보기에도 멋진 모자를 쓰고 있어서 딴 세상에서 온 부자처럼, 기관사나 뱃사람이나 비행사, 우주인처럼 보였다.

 
"어디 가니?"

 
 "너는?"

  
우리는 운동장에서 마주섰다. 네가 천천히 다가왔다. 너를 보는 게 마지막이라는 느낌이 든 건 왜 였을까.

  
네 얼굴을 비추는 노란 햇빛은 내가 가게 될 다른 좋은 세상에서 오는 것 같았다. 해를 등지고 있는 내 몸에서 뻗은 그림자는 짧고 짙었다.

 
 "한번 안아 보자."

  "그래."

  나는 처음으로 너를 받아들였다. 네가 나를 안았던 팔을 풀고 외투 단추를 풀면서 말했다.

  
"너, 다시는 안 오겠구나."

 
 "그래."

  
너는 외투를 벌렸다. 나는 마지막으로 네 품안에 스며들었다.

  
"사랑한다."

  
너는 나를 깊이 안았다.

  
"나도."

  
지나가던 아이들이 우리를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지옥의 공장에서 빵 트럭이 쏟아져 나오고 딴 세상 바다에선 고래들이 펄쩍 뛰어오르던 그때, 나는 비로소 내가 사내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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